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마이클 (문단 편집) == 상세 == 서양인들의 발음, 특히 [[영어]] 발음은 [[비성]]을 자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동양에 미성 가수가 많은 이유 중 하나다.] "Easy to listen, Hard to sing"이라 요약되는 조지 마이클의 보컬은 비성과 높은 피치에서 터져나오는 미성이 혼합된 특유의 창법[* 비슷한 창법을 가진 가수로는 미국가수 [[케니 로긴스]]가 있다. 둘다 80년대 팝뮤직의 전설이다.]과 자신만의 곡 해석력, 미칠 듯한 그루브함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의 곡들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레퍼토리로 선곡되는 경우가 많은데, 막상 불러보면 굉장히 어려워서 노래를 좀 불렀다는 사람이라면 두말 할 나위 없이 모창이 힘든 가수로 손꼽는다. 조지 마이클은 보컬 면에서 [[엘튼 존]][* 엘튼 존이 [[1974년]]에 발표했었다가 나중에 조지 마이클과 다시 커버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가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다.], [[아레사 프랭클린]][* 그녀와 함께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를 불러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스티비 원더]], [[프레디 머큐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프레디 머큐리의 추모공연에 참여해 [[퀸(밴드)|퀸]]의 멤버들과 공연하기도 했는데, 이 때 부른 Somebody to Love는 명라이브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싱어송라이터로도 유명한데,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고 시대가 지나서도 촌스럽지 않다. 비록 요즘 10, 20대들은 조지 마이클 하면 낯설수있지만, 왬 활동 도중 발표한 [[Last Christmas]]뿐 아니라 [[Wake Me Up Before You Go-Go]], 왬 활동 막바지에 솔로로 발표한 [[Careless Whisper]][* 당시 미국에선 'Wham! featuring George Michael' 명의로 발표되어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랐다. 왬에게 큰 성공을 안겨준 곡이지만, 이 곡으로 얽힌 멤버 간의 불화가 해체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 좀 아이러니하다. 한국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각종 서브컬처에서 에로틱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BGM|브금]]으로 도입부 색소폰 연주가 자주 나온다.]나 왬 해체 이후 솔로 데뷔 싱글 [[Faith]]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솔로 데뷔 앨범에서만 빌보드 1위 곡을 4개나 터트려서 1980년대 [[마이클 잭슨]], [[프린스(음악가)|프린스]], [[마돈나(가수)|마돈나]]와 함께 슈퍼스타급 인기를 얻었다. 당시를 두고 "백의 마이클과 [[마이클 잭슨|흑의 마이클]]이 경쟁을 하는 시대"라는 표현이 있었을 정도. 물론 언론이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음악가)|프린스]]를 라이벌 관계로 몰아간 것과 비슷하게[* 물론 인기를 얻는 법에 대해 매우 해박했던 마이클 잭슨은 이 논란이 최고조가 될 때쯤 Bad를 [[Beat It|프린스와의 합작곡으로 내서 대박을 내려고 했으나]] 프린스는 Bad를 듣고 나서는 '이 노래는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라며 거절했고 이 콜라보는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퀸시 존스]]가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가 듀엣곡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그 듀엣곡이었던 Bad의 주제가 잭슨이 거리에서 폭력을 일삼는 자들에게 훈계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듀엣곡 제안과 함께 댄스 배틀을 함께 제시했던 퀸시 존스의 의견은 프린스의 음악 방향성과 맞지 않았다. 이후 프린스는 Bad의 가사인 "Your butt is mine, gonna tell you right"의 의미를 물어보며 재치있게 거절했다.][* 참고로 프린스와 마이클이 관계가 나빴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잭슨 생전에 프린스는 여러 차례 그와 그의 여동생을 보고 천재라고 치켜세웠고, 잭슨이 사망했던 당시엔 프린스가 매우 힘들어했다고 밝혔고, 실제 사적 관계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이들은 언플의 주요 피해자들이다. 다만 잭슨은 사적으론 장난기 많은 사람이었다보니 인터뷰 등에서 "프린스도 대단하지만 나는 더 대단해" 식의 발언을 몇 번 하기는 했다.] 이도 언론 플레이 중 하나였다. [youtube(6Cs3Pvmmv0E)] 조지 마이클의 솔로 데뷔곡이자, 명실상부한 조지 마이클의 베스트 곡인 '[[Faith(조지 마이클)|Faith]]'. 일부 록 리스너들에게는 1998년 [[림프 비즈킷]]이 [[https://www.youtube.com/watch?v=l-EdCNjumvI|커버한 버전]]이 익숙할 수도 있다.[* 정작 조지 마이클은 이 커버버전을 매우 안좋아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N5zxD8qwiI|커밍아웃한 아담 램버트가 커버한 Faith]]도 있다. 하지만 대중성보다 음악성에 초점을 두고 만든 정규 2집 앨범이 1집보다 부진하자 조지 마이클은 2집을 제대로 홍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91년]]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소니 뮤직]]에게 소송을 걸었고, 소니 뮤직과 길고 긴 법정 투쟁을 하는 동안 앨범을 내지 못한 조지 마이클은 대중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이때 소니 뮤직 사장이 하필 또 그 토미 머톨라인지라... 90년대 때 소니 뮤직의 위상이 엄청났던지라 소송이 씨알도 안먹혔다.] 소송이 마무리된 [[1996년]]에는 새 앨범 《Older》를 발표하면서 주목받나 했더니 [[1998년]] LA의 어느 공원 화장실에서 [[함정수사]]로 체포된 사건 때문에 안 좋은 쪽으로 화제가 되었다.[* 잘생긴 잠복수사 경찰이(경찰인지 몰랐다) 화장실로 유인해 따라들어 갔고, 경찰이 화장실에서 서로의 성기를 보여주자해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뭐지 이 순진한 인간은.-- 조지 마이클은 체포 사건으로 언론에 의해 강제 [[아웃팅]]당한 사례로 상당한 인권 침해에 해당된다.][* 참고로 왬 시절까지는 양성애자였다. 첫사랑을 느낀 것도 12살 때 제인이라는 또래의 금발머리 여자였으며, 왬 시절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자들과 사귀었으며, 또 자 봤다고. 왬을 해체하고 솔로로 나설 때쯤 자신이 완전한 동성애자인 것을 자각했다고 한다.] 조지 마이클은 해당 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함정수사를 당했다고 변호했으며, 약 800유로의 벌금과 30시간의 자원봉사 형을 선고받았다. 얼마 후 발매한 싱글 Outside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이 사건을 풍자하기도 했다. 1999년에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공식적으로 커밍아웃 하였다. 조지 마이클은 브라질 출신의 디자이너 안셀모 펠레파와 1991년 처음 만나 안셀모가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에이즈]]로 죽은 1993년까지 매우 진지한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엔 부모님도 자기가 게이인지 모르던 때라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사랑하는 이의 사별을 견디기 매우 힘들어 했다고. 1996년 앨범 타이틀곡인 Jesus to a Child는 안셀모를 기리기 위해 지은 노래였고, 2004년 앨범에서도 Please Send Me Someone to Love (Anselmo's Song)이라는 노래를 수록해 특별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엔 [[이라크 전쟁]]에 대하여 무척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라디오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를 [[푸들]](Bush's Poodle)이라며 신나게 까면서 영국과 미국 내에서 논란이 일었고, 음악 외의 부분에서 회자되다 보니 이미지도 안 좋아졌다. 물론 이라크 전쟁이 기나긴 수렁에 빠지면서 여론이 돌아서자, 조지 마이클의 반전(反戰) 의견에 대한 지지도 늘어났다. [[마돈나(가수)|마돈나]] 등 동료 가수들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가 욕을 먹었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긍정적으로 돌아간 경우. 그리고,푸들은 이후 토니 블레어의 대중적 별명이 되어버렸다. 여하튼, 이 때 마음적으로 괴로웠는지 [[2003년]]에 [[은퇴]] 선언까지 했다. [[2004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소니 뮤직과 재계약, 새 앨범 《Patience》를 발표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로는 콘서트 위주로 활동했다. 1996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댈러스 출신의 케니 고스라는 파트너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이놈이 공원에서 뭔 짓을 했어?-- 2005년경에 시민결합(법적 동거)을 하려고 할 정도로 진지한 사이였는데 이라크 전쟁 반대 등 정치적 이유로 인기가 급감하고 앨범과 콘서트가 부진해지자 무기한 연기했었다. 나중에 2011년이 돼서야 자기들이 2년 전부터 더 이상 연인관계가 아님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2011년]] 11월 21일, Symphonica 투어 도중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빈(오스트리아)|빈]] 병원에 입원했다. 급성 폐렴이었으며 치료 도중인 11월 25일에 갑자기 악화되어 코마 상태에 빠졌다. 다행히 12월 1일 깨어났지만 치료는 계속되었고 21일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건강을 되찾은 기념으로 병원에서 무료 공연도 펼쳤다. 코마 상태일 때 예전에 사망한 어머니가 나와서 아직 올 때가 아니라고, 돌아가라고 했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White Light 곡을 쓰게 된다.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공연에 출연하여 수억 명의 사람들 앞에서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확인시켰다. 2012년에 [[레바논]]계인 [[호주]] 출신 헤어 스타일리스트인 페디 파와즈와 사귀기 시작했다. [[미국 드라마]] 일라이 스톤(Eli Stone)에서는 주인공의 환상 부분에 직접 나와[* 그냥 카메오 수준이 아니라 일라이 스톤의 각 에피소드 제목들은 모두 조지 마이클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으며,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설명해주는 장치로 쓰인다.] Faith를 열창한다. 2016년 12월 25일 새벽 자택에서 취침 중이던 조지 마이클은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향년 53세. 사인은 [[심부전]]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히트곡처럼 정말로 2016년이 그의 생애 [[Last Christmas|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사망 당시 총 2억달러(약 2402억)의 재산을 남겼다. [[허핑턴 포스트]]가 트위터에서 조지 마이클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팝스타 조지 마이클이 53세 나이로 집에서 죽었다고 짤막하게 기사를 썼는데, 유독 [[아랍어]] 기사로는 "조지 마이클은 마약중독자이자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다."는 문장을 첨언한 것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2019년 11월 5일, 사후 첫 번째 신곡이 공개되었다. 제목은 '''This Is How (We Want You To Get High)'''이며, 영화 [[라스트 크리스마스(영화)|라스트 크리스마스]]의 엔딩곡으로 삽입된다. 곡 자체는 2015년 마지막 세션때 녹음되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b6Gxl5PFJuk|듣기]] 조지 마이클의 사망 3주기인 2019년 12월 25일은 조지 마이클의 둘째 누나(1960년생)가 사망했다. 향년 59세.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여담으로 그가 소유하던 검은색 [[페라리 캘리포니아]]는 핫휠에서 모형으로 발매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